서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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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가계

서신일 (徐神逸)

서희 선생의 할아버지로써 그 묘소가 부발읍 효양산에 자리잡고 있다. 서신일은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들어와 은거하던 중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살려주고 나이 80세에 아들 필을 얻어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필 (徐弼)

901~965년 고려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이며 출생에 있어서는 아버지 신일이 사냥꾼의 화살 맞고 쫒기는 사슴을 구해준 은덕으로 80세에 낳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도필(刀筆)을 거쳐 내의령에 이르렀으며 아들 희(熙), 손자 눌(訥)이 모두 재상을 지냈다. 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천지방에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처음 관계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것 등을 보면 그가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그리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광종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광종계 인물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광종이 쌍기와 같은 귀화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섰던 것에서 보이듯이 직언과 간쟁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건의나 직언이 광종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고 내의령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만큼 중용되고 있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여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혁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개국공신이면서도 광종과 밀착되어 임금의 정치개혁을 지지해주고 있던 인물로 보인다. 죽은 뒤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에 추증되었으며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민(精敏)이다. 묘는 아들 희, 손자 눌과 함께 여주군 산북면 후리 품곡 상두산에 있다.

서눌 (徐訥)

972~1042년 본관은 이천이고 태보내사령 서희의 맏아들이다. 996년(성종 15)갑과에 급제하였다. 1016년(현종 7) 중승이 되고, 이듬해 형부시랑이 되어 송나라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018년 상서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를 거쳐 국자좨주 지이부사를 지냈다. 딸이 왕비가 되자 1022년중추사 우산기상시에 오르고 내사시랑 판서경유수사를 역임하였다. 1030년 문하시랑평장사 판상서이부사, 덕종(1032~1034) 초 검교태사가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정종(1035~1046) 때 판도병마사가 되었다. 1041년(정종 7)에 궤장을 하사받고 중대광으로 품계가 올랐다.. 이듬해 두 번 상표하여 퇴관을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병이 들어 지장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임금이 우승선, 김정준을 보내어 어의 2습, 곡식 1000석, 말 2필을 절에 바치고 복을 빌었다. 그 후 신병이 위독해지자 임금의 문병을 받고 삼중대광내사령에 임명되었으며 자손에게 영업전이 하사되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서목 (徐穆)

신라말 고려초 이천지방의 호족으로 본관은 이천이며 서신일(徐神逸)의 조카로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이천 사람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기 위해 당시 한주 소속의 황무군이었던 이 지역을 통과할 때 복하천에 당도해 때마침 홍수로 불어난 강의 수심을 알 길이 없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효양산 밑에 살던 서목이 이 광경을 보고 잘 인도하여 왕건의 군사가 무사히 도강해 후백제를 정벌하였다. 이 일로 하여 이천이라는 지명이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유래되어 태조가 내린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외 주변인물

소손녕

거란(契丹)의 장수이며 거란왕의 사위.·동경유수(東京留守). 총사령관으로 고려의 서북 국경으로 침입, 봉산을 빼앗고 계속 남침했다. 이에 서희가 단신 거란군영에 들어가 강경히 철군을 요청하자 안융진 전투에서 패해 사기가 저하되었으므로 강동6주 300리 지역을 넘겨주고 철군했다.

거란족

퉁구스족과 몽고족의 혼혈로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 유역에 살던 유목 민족인데, 당말의 혼란기에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 제국을 건설하였으며(916), 나중에 요로 이름을 바꾸었다. (947)

거란은 중원 진출 계획을 세워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926), 중원에서 송이 통일 제국을 수립하자 양국의 세력은 대립·투쟁하게 되었고, 중국 정벌 전 배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고려 침공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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